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 (문단 편집) ==== 바실리오스 2세 시기 ====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800px-Map_Byzantine_Empire_1025-en.svg.png]] 그러다가 [[바실리오스 1세]](재위 867년 ~ 886년)가 창건한 [[마케도니아 왕조]] 시기. 약 200년간에 걸쳐 전개된 이 시기에는 바실리오스 1세, 현제 [[레온 6세]](재위 886년 ~ 912년), [[로마노스 1세]] 레카피노스(재위 920년 ~ 944년), [[콘스탄티노스 7세]](재위 913년 ~ 959년), [[니키포로스 2세]](재위 963년 ~ 969년), [[요안니스 1세]] 치미스키스(재위 969년 ~ 976년) 등의 위대한 황제들이 배출되었던 시기이며 이들은 제국내부를 구조조정하여 재정건전성으로 세입을 늘리고 그만큼 군사력을 키워 [[바실리오스 2세]] 불가록토노스(불가리아인들의 학살자) 황제 시기 [[불가리아 제국]]을 멸망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제국이 강대국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전성기가 되었다. 이 시기의 영토는 395년의 제국 최종분할 당시의 동로마 제국의 약 60~70% 수준에 달하며[* 부유한 이집트와 레반트 지역 속주들이 날아가긴 했지만 대신 군사적으로 중요하고 지키기도 용이한 일리리아와 남이탈리아, 서부 아르메니아 지방이 제국으로 편입되었다.](물론 그 이후로 시대가 흘러 기술이 발전한 것을 감안해야겠지만) 인구와 세입금은 75%, 군사력은 110% 수준으로까지 도달했다.[* 세입에 비해 군비가 너무 많은 것 아닌가 싶겠지만, '''많은 거 맞다'''. 특히 동로마 제국은 전통적인 문제인 양면전선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군비의 소모가 강요되었고, 둔전병의 특성을 가지는 [[테마 제도]]를 고려해도 당시의 군비는 위험할 정도로 제국의 재정을 잡아먹었다.] 이 수치는 워랜 트레드골드가 추정한 수치인데, 일반적으로는 오히려 워랜이 인구와 세입금을 너무 보수적으로 잡았다고 보기 때문에, 대강 거의 동서 최종분할 당시의 동로마 제국 국력을 먼 길 돌아서 회복했다고 보고 있다.[* 시간이 흘러 인구가 증가하고 기술이 발전했는데 동서 최종분할 당시의 동로마 제국 국력을 회복까지밖에 못했느냐고 한다면 본래 동로마의 영토 중에서 부유한 인구밀집 지역이던 이집트와 시리아(레반트) 지역을 상실했기 때문이다. 즉 영토 자체는 크게 감소했지만 기술의 발전과 인구 증가, 그리고 남아있는 핵심 영토 경영의 효율화로 영토가 훨씬 넓던 시기와 맞먹는 국력을 키워냈다는 것이다.] 그러나 이 전성기는 11세기의 연이은 전쟁과 혼란으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. 동쪽으로는 [[룸 술탄국]]이 밀려들어왔고 북쪽에서는 [[쿠만족]], 페체네그족 등의 침략이 이어졌고 서쪽에서는 [[노르만]]의 공세가 줄을 이었다. 결국 [[만치케르트 전투]]가 결정타가 되어 기존의 테마였던 [[아나톨리아]] 반도 전부가 [[셀주크 제국]]의 치하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, 로마의 기존의 테마 체계가 와해되어 제국의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[[셀주크 제국]]에 지속적으로 안보가 노출되는 상황으로 [[알렉시오스 1세]] 황제가 이를 타개하기 위한 묘수로 [[셀주크 제국]]에 대한 서방의 지원군을 교황에게 요청하였으며 교황인 [[우르바노 2세]]가 [[십자군 전쟁]]을 선포함으로써 마침내 [[십자군 전쟁]]이 시작이 되었다. 이로인해 제국의 안보부담은 단기적으로는 한층 덜어지는 듯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제국에 맞먹거나 어떤 부문에서는 오히려 제국을 능가하게 될 정도로 부쩍 성장한 카톨릭 서구권과의 충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